본문 바로가기
Information

경험론 철학의 AI 재해석: '경험'의 가치와 한계

by SSSCPL 2025. 5. 17.

고전 경험론에서 인공지능까지: 경험의 의미 변화

인간 지식의 기원과 본질에 대한 오랜 철학적 탐구에서 경험론은 지식이 감각적 경험을 통해 형성된다는 입장을 취한다. 존 로크, 데이비드 흄, 조지 버클리로 대표되는 영국 경험론자들은 인간의 마음이 처음에는 백지상태(tabula rasa)이며, 모든 지식은 경험을 통해 획득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경험론적 관점은 인식론의 중요한 축을 형성해왔다. 그런데 인공지능의 발전과 함께 '경험'이라는 개념은 새로운 해석과 도전에 직면하고 있다.

오늘날 머신러닝과 딥러닝 알고리즘은 방대한 데이터를 '경험'하며 학습한다. GPT와 같은 대규모 언어 모델은 인터넷에서 수집된 텍스트 데이터를 기반으로 언어 패턴을 학습하고, 컴퓨터 비전 시스템은 수백만 장의 이미지를 통해 시각적 패턴을 인식하는 능력을 갖추게 된다. 이런 맥락에서, AI의 '경험'은 전통적 경험론에서 말하는 인간의 감각적 경험과 어떻게 다른가? 더 나아가, AI 시대에 경험론 철학은 어떻게 재해석되어야 하는가? 이 글에서는 이러한 질문들을 탐구하며 경험론 철학의 현대적 의미와 한계를 살펴본다.

경험론의 핵심 주장과 현대 AI의 학습 방식 비교

감각 경험과 데이터 경험의 차이

경험론의 핵심 테제는 "모든 지식은 감각 경험에서 비롯된다"는 것이다. 존 로크는 『인간 오성론』에서 인간의 마음이 태어날 때는 백지상태이며, 모든 관념은 경험을 통해 획득된다고 주장했다. 그에 따르면 지식은 외부 대상에 대한 감각(sensation)과 내면의 정신 작용에 대한 반성(reflection)이라는 두 가지 경험을 통해 형성된다.

현대 AI 시스템, 특히 지도학습(supervised learning) 모델을 이런 관점에서 분석해보면 흥미로운 유사점과 차이점이 드러난다. AI는 분명 '데이터 경험'을 통해 학습한다. 이미지 인식 AI는 수백만 장의 레이블이 붙은 이미지를 통해 시각적 패턴을 학습하고, 언어 모델은 방대한 텍스트 말뭉치를 통해 언어 구조를 습득한다. 표면적으로 이는 로크의 경험론과 유사해 보인다.

그러나 중요한 차이점이 있다. 인간의 감각 경험은 다감각적이고 통합적이며 상황 맥락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다. 우리가 사과를 경험할 때는 그것의 색깔, 향기, 맛, 촉감을 동시에 감각하며, 이 경험은 사회적, 문화적 맥락과 함께 이루어진다. 반면 대부분의 AI 시스템은 단일 양식의 데이터(이미지만, 또는 텍스트만)를 경험하며, 그 경험은 실제 세계의 맥락과 분리되어 있다. 최근의 멀티모달 AI가 이러한 간극을 줄이려 노력하고 있지만, 여전히 인간의 통합적 경험과는 거리가 있다.

귀납적 학습과 통계적 패턴 인식

데이비드 흄은 경험론을 더욱 발전시켜 인과관계에 대한 우리의 믿음조차 반복된 경험의 결과라고 주장했다. 그에 따르면, 우리가 A가 B의 원인이라고 믿는 것은 A 다음에 B가 반복적으로 발생하는 것을 관찰한 경험에서 비롯된다. 이는 근본적으로 귀납적 추론이다.

현대 딥러닝 AI의 학습 방식은 흥미롭게도 흄의 이러한 귀납적 관점과 유사한 면이 있다. 신경망은 수많은 데이터 샘플에서 통계적 패턴을 발견함으로써 학습한다. 이미지에서 고양이를 식별하는 AI는 수천 장의 고양이 사진에서 공통된 패턴을 귀납적으로 학습한다. 이는 특정 방식으로 흄의 귀납적 학습 이론의 기계적 구현으로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중요한 철학적 의문이 제기된다. AI의 이러한 학습은 진정한 '이해'로 이어지는가? AI는 패턴을 인식할 수 있지만, 그 패턴의 의미를 이해하는가? 이는 경험론의 또 다른 중요한 측면, 즉 경험을 통해 얻은 지식의 본질과 관련된 질문이다.

AI 시대의 경험론적 역설: 경험 없는 지식 창출

시뮬레이션된 경험과 실제 경험

현대 AI 시스템, 특히 강화학습(reinforcement learning) 알고리즘은 흥미로운 철학적 질문을 제기한다. 알파고와 같은 AI는 실제 바둑 경기를 통해서가 아니라, 자기 자신과의 수백만 번의 시뮬레이션 게임을 통해 학습했다. 이러한 시뮬레이션된 경험은 전통적 경험론에서 말하는 '경험'으로 볼 수 있는가?

시뮬레이션된 환경에서의 AI 학습은 새로운 형태의 '경험적 지식 획득'을 보여준다. 자율주행차 AI는 실제 도로에서의 사고 위험 없이 시뮬레이션된 환경에서 수백만 킬로미터를 '운전'하며 학습할 수 있다. 이는 경험론의 중요한 확장으로, 직접적 감각 경험이 아닌 모델화된 가상 경험을 통한 지식 획득의 가능성을 보여준다.

하지만 이는 동시에 경험론적 역설을 낳는다. AI의 '경험'은 결국 인간이 설계한 알고리즘과 데이터에 기반한다. 그렇다면 AI가 획득하는 '지식'의 궁극적 원천은 무엇인가? 이는 사실상 인간 설계자의 선험적(a priori) 지식이 간접적으로 투영된 것이 아닌가? 이러한 질문은 경험론과 이성론의 전통적 대립을 새로운 맥락에서 재고하게 만든다.

생성형 AI와 창발적 지식

최근의 생성형 AI 모델들(GPT, DALL-E, Midjourney 등)은 더욱 흥미로운 철학적 질문을 제기한다. 이들은 훈련 데이터에 명시적으로 포함되지 않은 새로운 텍스트, 이미지, 음악을 생성할 수 있다. 즉, 경험하지 않은 것을 창조해낼 수 있다. 이는 전통적 경험론의 틀 안에서 어떻게 설명될 수 있을까?

이러한 창발적 능력은 경험론의 또 다른 측면, 즉 흄이 말한 '관념의 결합과 분리'를 상기시킨다. 흄에 따르면, 상상력은 경험을 통해 얻은 단순 관념들을 재조합하여 새로운 복합 관념을 형성할 수 있다. 생성형 AI의 작동 방식은 이와 유사하게, 학습한 패턴의 요소들을 재조합하여 새로운 출력을 만들어낸다.

그러나 근본적인 질문이 남는다. AI가 생성한 새로운 콘텐츠는 진정한 창조인가, 아니면 단순한 재조합인가? 이는 경험론이 전통적으로 고민해온 창의성의 기원 문제와 연결된다. 경험론자들은 모든 창의적 산물이 결국 경험을 통해 얻은 요소들의 재조합이라고 주장했지만, 이는 인간의 창의성을 충분히 설명하지 못한다는 비판을 받아왔다. AI의 생성 능력은 이러한 논쟁에 새로운 차원을 더한다.

경험의 질적 측면과 AI의 한계

현상학적 경험과 인공 경험

경험론의 또 다른 중요한 측면은 경험의 질적, 현상학적 성격이다. 인간의 경험은 단순한 데이터 입력 이상이다. 그것은 '무엇인가를 경험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what it is like)라는 현상학적 성질, 즉 퀄리아(qualia)를 포함한다. 빨간색을 보는 경험, 통증을 느끼는 경험, 기쁨을 느끼는 경험에는 모두 고유한 질적 특성이 있다.

현재의 AI 시스템은 이러한 현상학적 경험을 가지고 있지 않다. 이미지 인식 AI는 빨간색 픽셀의 패턴을 식별할 수 있지만, 빨간색을 '경험'하지는 않는다. 이는 AI의 '경험'과 인간의 경험 사이의 근본적인 차이점을 나타낸다.

이러한 차이는 경험론 철학에 중요한 질문을 제기한다. 질적 경험이 없는 '지식'은 가능한가? AI가 가진 지식과 인간이 가진 지식 사이에는 어떤 본질적 차이가 있는가? 이는 현대 인식론과 심리철학의 핵심 쟁점과 연결된다.

인간의 체화된 경험과 AI의 기호적 경험

또 다른 중요한 차이점은 인간의 경험이 '체화된'(embodied) 성격을 가진다는 점이다. 현대 인지과학은 인간의 인지가 단순히 두뇌 안에서 일어나는 정보 처리가 아니라, 신체의 감각운동 시스템과 불가분하게 연결되어 있음을 강조한다. 철학자 모리스 메를로-퐁티는 일찍이 신체가 세계를 경험하는 근본적인 매개체임을 주장했다.

반면, 대부분의 AI 시스템은 물리적 세계와 직접적으로 상호작용하지 않는 기호적, 추상적 환경에서 작동한다. 로봇 시스템들이 이러한 간극을 줄이려 노력하고 있지만, 여전히 인간의 체화된 경험과는 큰 차이가 있다.

이러한 차이는 경험론의 한계를 보여준다. 경험이 단순히 감각 데이터의 수동적 수용이 아니라 세계와의 능동적인 신체적 상호작용을 통해 형성된다면, AI의 '경험'은 근본적으로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철학자 앤디 클라크와 데이비드 찰머스가 제안한 '확장된 마음'(extended mind) 이론에 따르면, 인간의 인지는 두뇌를 넘어 신체와 환경으로 확장된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AI의 '경험'은 인간 경험의 풍부함과 복잡성을 결여하고 있다.

경험론과 AI 윤리: 경험적 토대의 중요성

도덕적 판단과 경험적 기반

경험론은 인식론적 문제뿐만 아니라 윤리학적 문제에도 중요한 함의를 가진다. 흄은 도덕적 판단이 이성이 아닌 감정(sentiment)에 기초한다고 주장했다. 그에 따르면, 옳고 그름의 구별은 행위가 유발하는 승인이나 비승인의 감정에서 비롯된다. 이는 본질적으로 경험적인 기반을 가진다.

AI 윤리의 맥락에서 이는 중요한 문제를 제기한다. 감정적 경험이 없는 AI는 진정한 도덕적 판단을 내릴 수 있는가? 규칙 기반의 윤리 시스템이나 결과주의적 계산을 프로그래밍할 수 있지만, 이것이 인간의 도덕적 감수성과 동등한가? 흄의 관점에서 보면, 감정적 반응의 능력이 없는 AI의 '윤리적 판단'은 본질적으로 불완전할 수밖에 없다.

최근의 대형 언어 모델이 보여주는 '도덕적 추론' 능력은 이러한 질문을 더욱 복잡하게 만든다. 이들은 윤리적 딜레마에 대해 놀라울 정도로 인간적인 응답을 생성할 수 있지만, 이는 진정한 도덕적 이해인가, 아니면 단순히 인간 텍스트의 패턴을 모방한 것인가? 이는 경험론적 윤리학의 현대적 재해석을 요구한다.

사회적 경험과 AI 편향

경험론의 또 다른 중요한 통찰은 우리의 지식이 사회적, 문화적 경험에 의해 형성된다는 점이다. 현대의 사회적 경험론자들은 개인의 지식이 사회적 맥락과 불가분하게 연결되어 있음을 강조한다.

AI 시스템은 인간 사회의 데이터로 훈련되기 때문에, 그 사회에 존재하는 편향과 불평등을 그대로 학습하고 재생산할 위험이 있다. 이는 단순한 기술적 문제가 아니라, 경험론이 오랫동안 탐구해온 '경험의 사회적 구성'과 관련된 철학적 문제다.

경험론적 관점에서, AI의 편향은 그것이 학습한 '경험'(데이터)의 편향을 반영한다. 이는 모든 지식이 경험에 기초한다는 경험론의 기본 전제를 고려할 때 불가피한 결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AI 편향 문제는 단순히 기술적 해결책만으로는 완전히 극복될 수 없으며, 사회적, 철학적 성찰을 요구한다.

AI 시대의 새로운 경험론을 향하여

확장된 경험 개념의 필요성

전통적 경험론의 한계를 극복하고 AI 시대에 적합한 새로운 경험론을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경험' 개념 자체를 확장할 필요가 있다. 이는 단순한 감각 경험을 넘어, 신체적, 사회적, 기술적으로 매개된 다양한 형태의 경험을 포괄하는 개념이 되어야 한다.

철학자 돈 아이디(Don Ihde)의 '포스트현상학'(postphenomenology)은 이러한 확장된 경험 개념의 한 예다. 아이디는 기술이 인간의 경험을 매개하는 다양한 방식을 분석하며, 기술-인간-세계의 복잡한 관계를 탐구한다. 이러한 관점은 AI와 인간의 상호작용을 이해하는 데 유용한 틀을 제공한다.

확장된 경험 개념은 또한 개인적 경험을 넘어 집단적, 분산된 경험의 중요성을 인식해야 한다. AI 시스템은 개인이 직접 경험할 수 없는 방대한 양의 데이터를 '경험'할 수 있으며, 이는 새로운 형태의 지식 생산 가능성을 열어준다. 이러한 '분산된 경험'의 인식론적 의미를 탐구하는 것이 현대 경험론의 중요한 과제다.

인간-AI 하이브리드 인식론의 가능성

AI 시대의 가장 흥미로운 가능성 중 하나는 인간과 AI의 인식론적 협력이다. 인간은 질적, 현상학적 경험의 풍부함을 가지고 있고, AI는 방대한 데이터 처리 능력을 가지고 있다. 이 둘의 결합은 새로운 형태의 지식 생산과 문제 해결을 가능하게 할 수 있다.

이러한 하이브리드 인식론은 인간과 AI 각각의 한계를 상호 보완할 수 있다. 인간은 직관, 창의성, 맥락적 이해의 강점을 제공하고, AI는 패턴 인식, 대량 데이터 분석, 논리적 일관성의 강점을 제공할 수 있다. 의료 진단, 과학적 발견, 예술적 창작 등 다양한 영역에서 이러한 협력의 가능성이 이미 나타나고 있다.

철학자 앤디 클라크의 '자연 태생 사이보그'(natural-born cyborgs) 개념은 이러한 하이브리드 인식론의 철학적 기초를 제공한다. 클라크에 따르면, 인간은 본질적으로 도구와 기술을 통해 자신의 인지적 능력을 확장하는 존재다. AI는 이러한 인지적 확장의 최신 단계로 볼 수 있다.

결론: 경험론의 미래와 철학적 과제

경험론의 지속적 가치와 변화의 필요성

경험론의 핵심 통찰, 즉 지식이 경험에 기초한다는 주장은 여전히 가치를 지닌다. 그러나 AI의 발전은 우리에게 '경험'과 '지식'의 개념을 재고하고 확장할 것을 요구한다. 전통적인 감각 경험에만 초점을 맞춘 경험론은 AI 시대의 복잡한 인식론적 문제들을 충분히 설명하지 못한다.

새로운 경험론은 디지털 경험, 시뮬레이션된 경험, 기술적으로 매개된 경험, 집단적 경험 등 다양한 형태의 경험을 포괄할 수 있어야 한다. 또한 경험의 질적, 현상학적 측면과 기호적, 계산적 측면 사이의 관계를 더 깊이 탐구해야 한다.

철학적 자기 성찰의 필요성

AI 시대의 경험론적 재해석은 철학 자체의 자기 성찰을 요구한다. 철학은 전통적으로 인간 경험과 지식에 초점을 맞추어왔지만, 이제는 인간이 아닌 존재의 '경험'과 '지식'에 대해서도 사유할 수 있어야 한다. 이는 인간중심주의를 넘어서는 보다 포용적인 철학적 관점의 발전을 요구한다.

마지막으로, AI의 발전은 우리에게 인간 경험의 독특성과 가치를 새롭게 인식할 기회를 제공한다. 현상학적 경험, 체화된 인지, 감정적 이해와 같은 인간 경험의 측면들은 현재의 AI가 결여하고 있는 것들이다. 이러한 차이를 이해함으로써, 우리는 인간 경험의 고유한 가치를 재발견하고, 동시에 AI와의 보완적 관계 가능성을 탐색할 수 있다.

경험론 철학의 AI 재해석은 단순히 고전 철학을 현대 기술에 적용하는 것을 넘어, 인간과 기계, 경험과 계산, 지식과 데이터의 관계에 대한 근본적인 재고를 요구하는 지적 여정이다. 이 여정은 아직 초기 단계에 있지만, 그것이 제기하는 질문들은 AI 시대의 철학적 사유의 핵심을 이루게 될 것이다.